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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불교와 유적
24)
지역의 토착 불교세력이 새롭게 등장한 실력자인 왕건의 후원을
받는 충담을 방해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원주지역과 관련이 깊던 궁
예를 몰아낸 왕건에 대한 지역반발세력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
도 있다.
어떻게 보든 충담이 흥법사에 주석하기 시작할 무렵의 원주불교는
고려 태조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왕건이
충담을 왕사로 받아들여 흥법사에 주석하게 함으로써 지역 불교세력
을 흡수하고 안돈시키는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경주
는 물론 동해안 지방에서 개경으로 통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원주지역을 새로운 불교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충담을 통해서 통합해
가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태조는 재위 23년(940) 충담이 입적하자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지어서
비석을 세우는 각별함을 보이고 있는데, 충담의 역할이 원주지역의
불교세력을 통합하는 데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흥법사는 태조 왕건의 지원으로 원주지역의 대표적인 선종 사
찰로 거듭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사실로 반드시 충담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944년
24)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주지역은 궁예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이다. 궁예는
화엄종 사찰인 세달사 출신의 승려이면서, 집권시에는 미륵신앙을 지배이념의 핵
심으로 삼았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충담이 흥법사에 주석할 무렵의 원주불
교는 비마라사나 구룡사 등으로 대표되는 의상계 화엄종
미륵신앙으로 대표되
는 진표 계통의 법상종 역시 그 세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혹 고려 태조
는 자신에게 반하여 여전히 궁예를 추종하는 성향이 강했던 원주 불교계를 장악하
기 위한 방편으로 충담을 원주지역에 주석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